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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찾기 여행] 바람아래 드르니 샛별 꽃지… 詩처럼 고운 태안의 해변들




우리말 찾기 여행③ 태안의 우리말 지명


충남 태안 드르니항. 배가 하도 많이 들러 드르니항이 됐다는데, 왕년의 영화일 따름이다. 주꾸미 배 너머로 보이는 다리가 바다 건너 안면도 백사장항을 잇는 '대하랑 꽃게랑' 다리다. 손민호 기자

충남 태안은 해수욕장의 고장이다. 태안군 관광지도에 따르면 태안반도와 안면도 서쪽을 따라 모두 38곳의 해수욕장이 늘어서 있다. 태안의 해변은 이름도 경치만큼 아름답다. 바람아래, 드르니, 샛별, 꽃지, 운여, 섬옷섬, 두애기… 하나같이 어감이 고운데, 뜻이 잘 안 와 닿는 것도 많다. 홍경자(67) 태안군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이름 고운 태안의 해변을 찾아다녔다.  


안면도 맨 남쪽 모서리에 들어 앉은 바람아래 해수욕장.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손민호 기자

태안의 우리말 찾기 여행은 안면도 맨 아래 모퉁이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이름이 예쁜 해수욕장이 숨어 있다. 바람아래. 해수욕장 이름이 ‘바람아래’라니. 윤동주의 시에서 빌린 것 같은 이름이다. 한없이 펼쳐진 모래언덕 아래로 바람이 비껴간다는 뜻이 매겨져 있다. 바람아래 해변은 맛조개 갯벌 체험으로도 유명하다. 


바람아래 해변 어귀. 갯벌 너머 보이는 작은 섬이 섬옷섬이고, 희미하게 보이는 포구가 옷점항이다. 고려 시대 비단 무역을 했던 장소다. 손민호 기자

바람아래 해변 건너편으로 ‘옷점항’이 보인다. 포구 이름치고 낯설다. 여기엔 사연이 배어 있다. 옛날 이 포구에 어부 옷을 파는 가게가 있었단다. ‘옷’과 ‘점방’이 합쳐 ‘옷점’이 되었다. 옷점항 앞 작은 섬의 이름은 ‘섬옷섬’이다. 썰물 때 배가 항구까지 못 들어오면 이 섬에서 옷을 팔았단다. 『태안군지』에는 ‘섬옷섬’이 ‘섬옷점’으로 달리 표기돼 있다.


그 유명한 운여 해변의 일몰이다. 이 장면을 촬영하려면 날씨도 맞아야 하고, 일몰 시각도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 물때가 맞아야 한다. 썰물이면 솔숲 아래에 물이 없다. [중앙포토]

바람아래에서 서해안을 따라 오르면 ‘운여 해변’이 나온다. 솔숲 방조제 반영이 절경을 연출하는 신흥 일몰 명소다. 태안에는 ‘여’로 끝나는 지명이 많다. ‘두여’도 있고 ‘쌀썩은여’도 있다. ‘여(礖)’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다. 물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바위, 즉 암초를 이른다.  
 

운여는 ‘윗여’라는 뜻이다. 지금은 바다를 메워 땅이 됐지만, 옛날엔 ‘아랫여’도 있었단다. ‘두여 해변’은 여가 두 개여서 붙은 이름이다. ‘쌀썩은여’는 이름처럼 내력도 재미있다. 남도에서 곡물 실은 조운선이 여기 앞바다를 지났는데, 물살이 거칠고 여가 많아 조운선이 자주 침몰했었다. 그때 바다에 가라앉은 쌀이 썩어 쌀썩은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부러 배를 난파시켜 쌀을 빼돌렸다는 외전도 있다. 홍경자 해설사가 1970년대에도 이 해변에서 새까맣게 썩은 쌀을 주웠다고 증언했다.


샛별 해수욕장. 물이 빠지면 곱고도 단단한 모래사장이 드러난다. 손민호 기자


안면도 최대 관광지 꽃지 해변. 물이 빠지면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오롯이 드러난다. 유명한 일몰 포인트다. 손민호 기자

쌀썩은여 바로 위에 ‘샛별 해수욕장’이 있다. 솔숲 늘어선 이 해변과 하늘의 샛별은 관계가 없다. ‘새로 들인 (갯)벌’에서 ‘샛별’이 나왔다. 해수욕장이 속한 지명이 신야리(新野里)다. 새로운 들판 마을, 즉 간척지다. 옛날엔 이 일대가 죄 바다였다. 안면도 최대 관광지 ‘꽃지 해수욕장’은 어원이 분명하다. 해안을 따라 해당화가 만발해 ‘꽃 피는 땅’이라는 뜻의 ‘화지(花地)’라 불렸단다.  


두애기 해변의 여들. 물이 빠져 여가 드러났다. 날카로운 이빨처럼 솟은 여 때문에 배가 들어오지 못한다. 손민호 기자

‘두애기 해변’은 표기가 엇갈린다. 태안군 관광지도에는 ‘두애기’로 적혀 있고, 네이버 지도에는 ‘두에기’로 나와 있다. 홍경자 해설사는 “뚜에기”라고 불렀다.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땅’이라는 뜻이라는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걸 보니 태안 사투리로 보인다. 이름처럼 작고 아담하여 정이 가는 해변이다. 


드르니항은 주꾸미 잡이로 연명하고 있었다. 포구에 늘어선 주꾸미 낙시용 소라 껍데기. 바다에 드리우면 주꾸미가 집인 줄 알고 들어온단다. 손민호 기자

태안의 우리말 찾기 여행은 안면대교 건너 ‘드르니항’에서 끝난다. 태안반도와 안면도 사이에 다리가 없던 시절, 뭍 끄트머리의 드르니항은 코앞의 섬과 소통하는 맨 앞의 창구였다. 수많은 배가 수시로 들러 드르니항이다. 지금은 아니다. 상권이 죽어 휑하다. 


태안군청 근처 향토음식점 '담채'에서 먹은 서산 태안의 토속 음식 '게국지'. 옛날에 게로 담근 젓갈에 배추(또는 우거지)를 넣고 국처럼 끓였는데 요즘엔 생물 게를 넣고 탕처럼 끓인다. '게국지'라는 이름도 특이하다. 손민호 기자

어느새 해가 졌다. 지도에서 이름 짚어가며 여행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태안 해변이 전국 해변에서 이름이 제일 예쁘다는 사실을, 하여 독보적인 문화관광 콘텐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막상 태안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그래픽=심수휘 디자이너